아래 글은 최근 참.과학에서 출간한 “한국 제약의 지평 녹십자와 혈우환자 리뷰”의
“제15장 제약기업과 기업인” 중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2. 아홉 마리 암소의 교훈
지금은 작고하신 녹십자의 허영섭 회장은 한국의 제약 산업에 그리고 환자의 치료제로 국민보건에 큰 기여를 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혈우재단 책자에 고문자격으로 쓴 허 회장의 ‘아홉 마리 암소의 교훈’(한국혈우재단 코헴지 2002년 4월호)은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소면 될 것을 아홉 마리를 준 아프리카 청년 사업가의 이야기이다. 그는 “아내는 결혼 후로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에 걸맞게 하려고 노력했고, 점차 아름다워져 갔습니다.”라고 가치 부여의 효과를 전한다.
허 회장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 그는 “우리가 지닌 고유 가치와 잠재역량을 폄훼하지 말고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는 사람만이 그 가치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며 우리 민족 고유의 정(情)을 강조한다. 그래서 “모쪼록 우리 한국혈우재단도 설립 때부터 11년간 이어온 소중한 나눔의 정신을 늘 간직하고 나아갔으면 합니다.”라고 글을 맺었다.
녹십자 홈페이지의 글을 보면 허 회장은 혈우병 치료제를 값싸게 생산하고 혈우재단을 통해 환자에게 편리를 제공해 온 것을 사회에 대한 큰 기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가치부여의 산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연민일 수 있다. 한 마리면 될 것을 아홉 마리 암소를 주는 작위적인 가치부여 보다는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부이며 아름다워진 모습은 사랑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환자와 동화된 제약 기업인이라면 병들어 괴로워하는 아이의 부모의 심정으로 약을 만든다면 기업에 어떤 변화가 왔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1992년 대한혈우재활협회 상임이사 고종섭은 혈우병 환자들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에이즈가 발생하자 환자들에게 서신을 발송하였다. 녹십자가 그를 고소한 사유는 HCV 소송자료(2008.6. 고등법원, 준비서면)에 의하면 이러하다. “그런 일이 없는데 후진국민의 피를 밀수입해 와서 약품을 생산하고, 녹십자가 제조.공급한 혈우병 치료제는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TNBP 공법을 사용하여 제조한 것이므로 에이즈나 C형 간염 등에 감염될 우려가 없었는데도 이를 투약할 경우 에이즈 또는 C 형 간염 균을 감염시켜주는 무서운 약이고, 외국에서 수입한 약만이 청결한 약품인 것으로 단정하여 이제는 약값이 비싸고 외화를 낭비하더라도 수입 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서신을 발송하였다.”
고종섭은 구속 기소되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보다 슬픈 이야기는 없다. 에이즈 집단 발생이라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동료 혈우환자에게 절망의 서신을 발송하였다는 이유로 그는 혈우환자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은 것이다. 녹십자의 장황한 고소사유에서 고종섭의 잘못이라면 표현의 맥락은 알지 못하나 녹십자가 후진국의 피를 밀수입했다는 부분일 것이다.
당시는 녹십자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매혈자의 혈액을 혈우병 치료제의 원료로 사용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고종섭이 녹십자가 후진국의 피를 밀수입했다는 의심을 갖게 된 근거는 알지 못하지만 1994.10.18. 조선일보에 ‘수입혈장에 간염바이러스/중국산 일부서 보사부 전량 폐기’ 제목의 기사가 있고 2000.1.20. 한겨레신문에는 ‘녹십자 저질혈장 불법수입 파장’이 보도되었다. 녹십자 측에서는 “수입혈장 문제로 1998년 3개월 동안 수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리됐다”고 한다. 아마도 고종섭은 절망의 상태에서 이런 종류의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아닌 가 추정된다.
이들은 녹십자의 약을 사용하는 환자이다. 적어도 이들을 약의 소비자로 여긴다면 이것이 오해라고 실제 혈장을 수집하는 절차와 제품의 제조과정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자부심을 가진 기업인의 방식일 것 같은데, 어째서 녹십자는 그 병약한 고종섭을 상대로 신문 기자에 대한 것과 같은 해명도 아니고 고소를 하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당시 녹십자는 환자 지원 단체인 한국혈우재단을 만들고 있었다. 환자 지원 단체는 환자의 어려움을 돕기 위한 단체이다. 그러면서 녹십자는 고종섭을 고소한 것은 녹십자의 명예와 신용을 회복하기 위한 적법하고도 정당한 권리행사였고 형사처벌도 모두 적법절차에 따라 이뤄졌다고 한다.
그 후 2002.3. 녹십자는 에이즈에 감염된 매혈자의 혈액이 혈우환자의 에이즈 집단 감염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울산의대 조영걸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무려 15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과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학은 오류 가운데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연구는 항상 불충분하며 토론을 통해 연구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이 시작된다. 만일 조영걸 교수의 논문에 문제와 한계가 있다면 논문을 평가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으로 족할 터인데 일개 학자에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상을 요구하는 심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1심에서 조교수가 패소했을 때 배상에 대한 강제집행을 시도하였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다행히도 상급 법원은 조교수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이번에는 녹십자는 억울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녹십자의 어떠한 가치가 삶을 절규하는 환자를 감옥에 가두며 적법 절차를 말하고 에이즈의 감염 경로를 밝히려는 연구에 차압딱지를 부쳤다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하도록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약 기업인의 제일의 가치는 타인에게 또는 자신에게 무엇을 부여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