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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학적 사실성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 저자 서문
  글쓴이 : kopsa     날짜 : 09-02-06 09:18     조회 : 4149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 저자 서문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는 2003년 출간되었던 ‘진화론 창조론 산책’의 개정증보판입니다. 저자 서문의 끝에 있는 대로 “오류의 부분은 수정하고 미진한 부분은 좀 더 설명을 달고 또 새로이 진전된 부분은 추가하여” 제목을 바꾸어 내 놓은 책입니다. 80쪽 정도의 분량이 추가됐습니다.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진화론 창조론 산책 개정증보판) 저자 서문’
과학과 종교의 문제,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시각 

  필자는 이제 죽으면 정신과 마음, 의식과 영혼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육체와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신이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건 근거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 또는 부정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틀렸다고 말할 수 없고 당신은 틀린 것을 믿어 싫다는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신을 믿건 부정하건 그것이 각자의 신앙 또는 믿음이라는 통찰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개개인의 믿음이 그 삶에 어떻게 긍정적으로 표출되는지 애정과 흥미를 갖고 상대편을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다윈의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하곤 한다. 그는 1879년 편지에 나타난 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나는 무신론자인 적이 없으며 불가지론자라는 것이 나의 마음 상태의 좀 더 정확한 기술일 것이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곧 이어 “나 자신의 견해가 무엇이든 나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중요성이 없는 문제이다”라고 달았는데 개인적 가치인 이상 다른 견해를 배척할 아무 이유가 없으며 다윈도 그러한 말을 했으나 어떤 믿음이든 이 삶에서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다윈이 불가지론자에 도달한 과정은 이성적 추리를 좇는 과학자의 사고를 이해하기에 적절하다. 그는 허허 벌판 잔인한 자연 속에서 내동댕이쳐지던 우리의 조상을 상상한다. 지금도 전지전능해야 할 신이라면 이 세상의 엄청난 고통을 방치할 수 있겠는가. 그는 1871년 <인간의 조상(The Descent of Man 인간의 유래)>에서 “보편적이고 은혜로운 창조자의 아이디어는 오랜 문화에 의해 고상해 져서야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를 온전히 믿는 많은 능력 있는 사람’에 생각이 미치자 판단을 유보하여 1873 편지에서는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 총체적 주제가 인간의 지적 능력의 범위 밖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다윈도 신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1876년 자서전에 의하면 “비글호 항해 도중 브라질 숲의 위대한 장관 가운데 서서 ....인간에게는 육체적 숨보다는 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을 “강력하나 모호한 음악에 의해 여기 되는 유사한 감정 이상일 수 없다고” 감정 가운데 신을 떨쳐 버린다. 이어 그는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때가 있음을, 그 원천을 “먼 과거와 먼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포함한 이 엄청나고 경이로운 우주를 맹목적인 우연 또는 필연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거나 불가능한데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적인 정신을 가진 신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이것은 <종의 기원>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고 표현하였다.
 
  이런 그가 신에 의문을 갖게 된 이유는 ‘지적 정신의 설계자’라는 의인화에 대한 혐오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주와 자연은 그대로 존재한다. 과학의 눈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경이로운 존재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존재 그대로 객체로 좇는다. 아마도 이렇게 다윈의 지적 설계자는 희미해져 갔고 “점차 많은 기복과 함께 약해졌다”는 표현이 이것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주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의문은 계속 남는다. 하지만 이 우주는 인간의 능력으로 답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다윈은 이것을 “가장 하등 동물이 가진 것과 같은 낮은 마음에서 진화한 인간의 정신이 그러한 웅대한 결론을 도출했을 때 믿을 수가 있는가 의심이 일었다”고, 진화론의 용어로 말하였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것의 기원의 미스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며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는데 만족해야 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10년간 과학적 회의주의 활동을 하며 회의주의라는 용어가  남용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 믿을 것이 없다는 인간에게 무엇이건 확실히 아는 능력이 있는지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철학적 회의주의(philosophical skepticism)는 자신 이외의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유아론(唯我論)이나 객관적 윤리적 기준을 부인하는 윤리적 주관론 그리고 과학에서는 참을 추구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과학계가 정하기 나름이라는 상대론적 과학론의 추종이다. 이들은 또한 형이상학적 신학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자의 입장을 취하나 단지 무엇이든 아는 능력을 의심하는 철학적 속성에 기인할 뿐이다.
 
  우리는 의심을 하되 철학적 회의주의자와 같은 총체적인 보편적 회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문에 대해 신뢰성이 있는 기준에 입각하여 회의하는 건설적 회의주의자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회의주의(scientific skepticism)에 해당한다. 여기서 ‘과학적’은 회의의 ‘신뢰성이 있는 기준’이 과학적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이 방법은 자연은 시공간적 물질적 요소로 구성됐고, 자연적 과정은 자연적 법칙을 따르며, 초자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다.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유물론적 방법으로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방법이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회의의 방법론으로써 과학적 방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연주의 외적인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는 종교적 도그마 등 일반적인 종교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과학적 회의주의자에게 신앙의 세계는 과학과 나란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이것이 다윈의 마음이었고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제수이트 신부의 관점에서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라고 불러도 좋다고 하였는데 무신론자라는 것은 인격신과 신의 동일선상에서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성경적 인격신을 믿지 않는 그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그가 “나는 대부분 그 열정이 어린 시절 받았던 종교적 주의의 속박으로부터의 고통스러운 해방 행위에 기인한 전문 무신론자의 순교자적인 정신을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하였을 때 그리고 “나는 우리의 자연에 대한 그리고 우리 존재에 대한 지적 이해의 취약성에 기인한 겸손한 태도라는 편이다”라고 한 대목에서 다윈과 아인슈타인의 모습은 중첩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경이로운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위대한 과학자이다. 
 

  종교적 문제를 비판하는 회의주의자라면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도킨스는 얼마 전 <신이라는 망상(God Delusion)>에서 책 제목의 망상이 “한 사람이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고 한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반경의 철학적 자연주의자(philosophical naturalist)이다. 철학적 자연주의는 대부분 형이상학적, 철학적, 종교적 주장을 그 주장의 참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폐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는 과학의 기준으로 종교의 역사성과 도그마의 허구를 비판하며 종교에 대안적인 삶의 철학으로 과학과 이성을 제시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의 과학적 회의주의자와 무신론적 반종교적 철학적 자연주의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예로써 설명한다. 종교와 과학 토론에서 어느 교수가 중보기도 효과 연구와 관련하여 “중보기도의 과학적 효과에 대한 입증 책임은 그 효과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전 집에 금송아지가 300마리가 있다. 그 말을 입증할 책임은 제게 있는 겁니다”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중보기도는 기독교 신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그 효과를 믿거나 기대하며 행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라도 효과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데, 주장자가 증명하라는 흔히 허튼 주장을 했을 때 그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회의주의자의 말을 빌리는 것은 신의 존재를 외계인이나 백두산의 공룡쯤으로 여기는 반종교적 무신론자의 사고로 보인다. 이러한 편향적 사고의 대중적 철학적 자연주의자와는 달리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중보기도 효과 여부가 객관적으로 연구에 의해 확인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2008년 6,7월 SBS는 반기독교적인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방영하였다. 민영방송이기 때문에 특정 종교를 부정하는 프로그램의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나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는 무신론자인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가 인용됐듯이 철학적 자연주의의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교회언론회에서는 “이 프로그램은 정통 기독교 입장을 피력할 신학자는 철저히 배제시키므로, 방송의 기획․의도된 방향을 시청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예수 그리스도 등과 관련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고대 신화의 재구성으로 단정하는 등 기독교 부정의 이념적 색채가 배어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비판적 사고의 정신, 즉 정직성과 특히 객관성을 따른다면 프로그램에 정통 기독교 신학자의 시각이 함께 반영돼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세계 종교 인구 통계에 의하면 첨단 과학시대인 오늘날 종교 인구는 86%이며 나머지는 무종교(11.9%)와 무신론자 반종교 인구(2.3%)이다. 과학 혁명기 인간을 신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자연주의적 과학의 기운이었지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도 역병도 모두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신의 벌로 치부되었고 교회가 속죄를 강요하던 때였다. 이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고 일어서겠다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자연은 자연 법칙을 따르는 자연 과정에 의해 작동한다는 자연주의적 과학의 기운이었다. 이 기운은 신의 영역에 경계를 설정하였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깊게 자리 잡은 신은 배척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서 종교적 이념적 오류의 시정은 또 하나의 무신론주의적 이념적 운동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한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몫일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과학 혁명의 교훈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의 근본은 정직성과 객관성이다. 자료 하나 하나가 정직하고 객관적인 사실적 근거에 바탕하고 자료의 일반화와 가설의 예측성은 논리적 오류가 없이 객관적으로 추리돼야 한다. 이 사실적 근거와 오류가 없는 추리라는 과학적 사고(비판적 사고)는 사회의 온갖 미신, 편견, 무지를 깨우쳐 인간이 인간답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비판적 사고야 말로 신앙에 매몰된 기독교근본주의의 창조론에도 힘을 발휘하여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한 가운데 그 오류의 부분만을 합리적으로 설득하여 포기시키는 가장 확실한 접근일 것이다.
 

  한국 창조론 운동을 시발시켰다고 하는 한동대 김영길 총장은 2007년에도 ‘21세기의 선교교육 창조과학, 그것을 선교한다’는 글을 통해 진화론은 인류의 양심을 어둡게 하는 과학적으로도 틀린 이론이며 하나님의 성경말씀대로의 창조과학을 21세기의 선교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일찍부터 필자는 이러한 창조과학 반경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아왔다. 과학적으로 창조과학이 틀린 이론인데, 설혹 일시적으로 일부를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틀린 거짓됨으로 어떻게 종교의 목적이기도 한 인간을 밝게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과학은 이념의 시녀로 부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창조과학 반경의 소망교회 인터넷 TV 신앙강좌 ‘종교와 과학’에는 성경이 정확하다는 10여 가지 예를 소개하고 있다. 이 예로써 성경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정확하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기본적인 과학적 사고의 문제가 보인다. 성경의 수많은 사실적으로 기술된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 원하는 자료를 선정하여 그것을 일반화하여 성경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자료라는 것도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면 이들은 고의적이 아니라고 해도 무지와 조작을 설교하는 셈이다.
 
  설교 가운데는 창세기(17:12)의 ‘누구든 남자 아이는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반드시 할레를 받도록 하여야 한다’는 구절의 부분을 포경수술의 출혈을 방지할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있는, 성경이 정확하다는 증거라는 부분이 있었다. 이들은 과학적인 근거로 혈액 응고 인자의 농도가 태어난 지 3일째는 30%, 8일째는 110%, 그 후는 정상인 100%이며 8일째의 농도가 가장 높다고 하였는데, 문헌에는 혈액응고의 마지막 단계에 작용하는 트롬빈으로 변하는 가용성 프로트롬빈 농도가 태어난지 1일째는 90%에서 80%로 감소하고 점차 감소하여 3일째는 40%가 되고 다시 증가를 시작하여 6일째는 90%, 7일째는 100%, 8일째는 110%로 변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강좌 내용과 유사하다.

  이 경우 과학자라면 우선 이 결과가 재현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농도 %가 갖는 의미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혈액을 측정한 평균치일 것이다. 100%라고 해도 그 중에는 90%, 110%가 섞여 있으며 110%란 아마도 오차 범위내의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그 다음에는 90%, 110%, 100%가 사실적 차이라고 해도 그것이 출혈 억제에(또는 생명의 위협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포경 수술에서는 혈관을 잡아 출혈을 억제하는 조처와 수술 후 감염 방지가 핵심일 것이다. 일반적 물리적 출혈 억제 조처가  취해진 상태에서 이 응고 인자 농도 수치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하겠다.
 
  어쨌든 어느 때 수술을 하건 포경 수술이 출혈의 위험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혈우병 등 혈액 응고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모든 헤브라이 사람에게 포경수술을 하라고 했을까? 당연히 물어야할 질문이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30% 정도가 종교적 이유든 무슨 이유든 포경 수술을 하며, 그래서 성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든가 최근에는 에이즈를 예방한다고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린 시절의 통증 경험이 정신적 상처로 남는다는 논란도 있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로 볼 수 있을까? 종교적 의문은 끝이 없다. 이렇게 세심하게 혈액응고가 적합하도록 포경 수술을 배려했다면 어째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포경수술이 불필요한 인체를 만들어주지 않았는지?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사람의 포경 수술 해석은 다르다. 여러 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포경 수술이 성경이 기록되던 때의 헤브라이 사람의 의식 내지 관습이며 포경 수술은 성기를 성스럽게 함과 동시에 같은 헤브라이 사람으로의 인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같은 성경 구절의 ‘바로 이 할레가 너희와 내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이다’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이때 8일째의 8은 일주일의 기간이 지나 8일째와 같이 그리고 노아 방주의 8명과 같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신비적 수라고도 한다.

 
  소망교회 ‘종교와 과학’을 시청하며 진지하게 강의하는 목사님이나 이들 듣는 신자를 볼 때 무엇을 세뇌하고 세뇌당하고 있다는 두려움조차 느낀다. 2003년 <진화론 창조론 산책>을 출간한 이유가 이것이다. 창조과학회에 가득한 이것이 틀린 과학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과학적 회의주의자의 책이기 때문에 그나마 종교 반경에서 관심을 갖고 읽어보지 않았나 싶다. 5-6년이 지나 절판 단계가 되었으나 지금도 다만 얼마라도 찾는 사람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오류의 부분은 수정하고 미진한 부분은 좀 더 설명을 달고 또 새로이 진전된 부분은 추가하여 금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책을 내 놓았다. 이 책을 통해 창조론자건 진화론자건 비판적 사고의 깨끗한 기반위에서 논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기대이다. 


                            2009년 1월 1일
                            峴 松 齋에서
                            저자 강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