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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학적 사실성
   
  '진화론 창조론 산책' 저자 서문
  글쓴이 : kopsa     날짜 : 03-09-24 16:05     조회 : 7969    
'진화론 창조론 산책' 저자 서문


저자 서문

책의 교정 원고를 받아 놓은 채 런던 방문 길에 올랐다. 여행의 목적 중에
는 이 책과 관련된 부분이 있었다. 잠시 원고에서 떠나 내용을 정리해 보
고 싶었다. 진화론에 비추어 창조론이 그릇됐다는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
이 과학과 종교라는 큰 틀을 잊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깊이가 없는 곧 잊
혀질 책을 쓴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진화론과 관련된 현장을 찾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의 다윈 센터(Darwin
Center)는 본문에 설명이 있는 대로이다. 커다란 박물관 자체가 대중을 위
한 것이라는 목적대로 구성되어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지구상에 살았던 생명의 모습 그리고 자연 속 이들의 역
사이다. 이 박물관이야말로 거대한 진화론의 전시장인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의 다윈 동상. 긴 턱수염,
대머리 이마 위의 주름 그리고 코의 모양은 여전하지만 하얀 대리석의 핏
기 없는 모습, 감정이 없어 보이는 눈은 자신의 생을 다하고 어디로 갈지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체념과 조용함일 것이다. 
 
외견상 다윈 센터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박물관 간이식당의 친근한 다윈 동
상, 다윈 센터와 별개의 다윈 전시실 등 진화론의 다윈을 직접 내 보인 부
분은 작아 보인다. 그러나 박물관을 가득 채운 생명 표본과 화석은 이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해석을 찾은 수많은 학자의 노력과 함께 진화 과학의
위엄으로 압도하고 있다. 이 현장에서 자연과 생명의 탐구라는 과학에 대
한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이 경의는 객관성, 합리성, 정직성을 바탕
으로 한 과학적 참의 탐구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과학이고, 과거와 현재 그 많은 과학자들이 열정을 다하여 일생을 보내는
가치이기도 하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인상기는 과학과 진화론을 확인시키려는 이 책의 연
장일 뿐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은 런던에 도착
한 즉시 방문한 다운 하우스(Down House)에서 발견하고 느낀 것들이다.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은 비글호 항해(1831-1836)에서 돌아온 뒤
에 거처를 런던으로 옮겨 일부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며 비글호 항해의 연구
노트를 정리하여 발표하며 학자와 교분을 쌓는다. 특히 그는 1837년에 진
화론에 관한 아이디어를 구성하기 시작하여 1842년 여름 초 간략한 개요를
적어 내었다. 그리고 가을에 이사한 곳이 런던에서 가까운 시골마을인 다
운이다. 다윈은 1882년 사망할 때까지 40년간 다운 하우스에서 살았다.

*다윈이 살던 때의 다운 하우스(Down House).
 
다운 하우스야말로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위시하여 중요 논문을
발표한 곳이다. 그곳은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
은 진화론의 산실이다.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에 의해 보존
된 다운 하우스는 여느 시골 저택과 다름없어 보였다. 입구에 마련된 조그
만 상점에 진열된 책들을 보고는 실제 다윈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윈이 일생 어떤 일들 속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았
는지 그의 전기 하나 읽어보지 않았다는 결핍에 대한 인식이었다.

상점과 통한 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에 다윈의 부인 에마(Emma)가 치던 피
아노가 놓여 있는 거실이 있고 조금 지나 왼쪽에는 다윈의 연구 장소인 서
재가 있었다. 서재의 옆은 다윈이 머리를 식히던 당구대가 있는 방이 그리
고 그 맞은 편은 식당이었다. 2층은 다윈과 관련한 자료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그의 삶의 모습은 2층 계단이 나타나는 곳 맞은 편에 놓인 조그만
책장 주변에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윈의 서재 연구실(Darwin's study).

그 책장 위에는 소포와 편지가 놓여 있었다. 다윈은 다운 하우스로 이사하
며 런던에 나가 학자들과 교류할 생각이었으나 자주 병을 앓는 등 하여 그
렇게 하지 못하고 은둔하여 편지로 외부 세계와 교통했다. 책장이 있는 벽
에는 3개의 그림이 걸려 있는데 모두 기독교 그림이었다. 그 중 하나는 사
망한 여인을 땅에 묻고 있는 가운데 하늘의 천사가 아이를 인도하는 모습
이었는데 아이는 영혼을 의미하였다.

다윈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살았다. 이 그림은 관리인이 전해 준 책자에 
1882년 다운 하우스의 비품 목록에 포함된 실제의 그림이라고 적혀 있다.
1862년 에마의 언니가 사망하며 에마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다시금
다윈과 가족의 종교적 성향 그리고 이 성향이 일상 생활에 어떻게 나타났
으며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는 크나큰 결핍을
통감하여야 했다.

복도를 걸으며 다운 하우스 책자를 유심히 보자 실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1839년 다윈과 결혼한 에마는 외국어에 능하고 피아노를 잘 치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그는 병치레가 잦았던 다윈을 위해 헌신하였고
10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다(둘은 유아 때 하나는 10살 때 사망했다). 다윈
과 에마와 달랐던 점은 한가지 종교적 성향이었다. 에마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반면 다윈은 그렇지 않았다. 다윈은 내재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도전
하는 이론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둘 사이에 어떤 틈새도 만
들어 내지 않았다. 그는 다윈이 과학계 친구에게 보낼 원고를 읽는 등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으로든 도왔다.

*1854년 아들 레오나드(Leonard)와 함께 한 다윈의 부인 에마(처녀 명
Emma Wedgwood). 잘 교육받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성으로 다윈을 위
해 헌신적인 생을 보냈다. 그는 생의 고통을 신앙심으로 극복했으며 다윈
에게 기도할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다윈은 종교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라고 여겨 말을 삼갔다. 

다운 하우스 책자에는 '고통스러운 그리고 잔인한 사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다윈의 맏딸 애니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는 1851년 10살 때 임신한 에마
를 두고 다윈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간 곳에서 장티푸스 증세를 보인
열병으로 사망했다. 다윈은 일생 이 사진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에마는 이러한 고통을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는 다윈도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내세에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했고 다윈에
게 기도할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다윈의 맏딸 애니(Annie). 1851년 10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였다. 다윈
은 이 사진을 들고 일생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애니의 사망은 다윈이 완
전히 버리지 않았던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조각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다윈에게 애니는 내세는 물론 현생에서 사망은 물론 벌조차 받을
수 없는 행복한 생을 살도록 되어 있는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아이였다. 이 아이는 단지 자연의 방해를 받아 병에 걸려 잔인하게 짓밟힌
것이다. 데스몬드(Adrian Desmond)와 무어(James Moore)가 지은 다윈 전기의
사진 설명에는 애니의 사망은 '다윈의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조그만 조각을
파괴했다'고 적혀 있다.
   
런던으로 돌아와 다윈의 종교적 배경을 자서전에서 찾아보았다. 인터넷에
는 간략히 정리된 자료들이 있었다. 다윈은 어린 시절 성공회 세례를 받고
기도를 하는 생활을 했다. 2년간 에든버러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 중단한
다음에 아버지의 뜻대로 성공회 목사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그리스도 대
학에 들어갔다. 그도 시골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좋아했고 성경의 모든 문
구가 글자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3년간의 신학 공부 동
안 팔레이(William Paley)의 <자연 신학>에 경탄하기도 했다.

당시 다윈이 가족의 사망을 겪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든 친구의 동
정이 성경에서 발견하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위안에 비하여 얼마나 소용없
게 보임에 틀림없는지" 말한 대목이 있는데 후에 에마가 다윈에게 들려주
던 말과 유사하다. 다윈은 공식적으로 목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글
호의 항해에 참여하게 되어 점차 신앙이 쇠퇴하게 됐는데 첫 번 계기는 자
연의 모든 것이 창세기에 적힌 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발견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서전에 (1836년에서 1839년까지) "구약 성경을 신뢰할 수 없는 것
은 힌두교 경전이나 어떤 야만인의 믿음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는 것을 점차 알게 됐다"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성경
의 문자적 해석을 견지하여 심지어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오
히려 자기 파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이와
관련되었다. 종교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어눌하게 만드는 창조
론의 요소와 과학과 그 가치를 알려주어야 하겠다는 심정에서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이것 하나로 다윈의 신앙이 파괴되지는 않았다. 모르는 사이에
점차 누적된 결과이다. 그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이 영원히 벌을 받을 것이라는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볼 수
없으며 신약 성서에 관해서도 기적 등 요소를 믿기 어렵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의문 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서전에 "40세가 되던 1849년까지 나는 결
코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종말은 1851년 사랑
하는 딸 애니의 사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다윈은 기독교를 떠났지만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를 글로 적거나 하
는 일이 없이 말을 삼갔다. 1879년 편지에 나타난 대로 "나 자신의 견해가
무엇이든 나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중요성이 없는 문제이다"라는 것과 같
이 그는 종교적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여겼다. 에마가 일상 고통을 신앙
으로 극복한 것은 에마의 가치이며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윈에
게 내세의 기약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그가
(애니가) 짧지만 즐거운 생을 살았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2년 뒤 아이를
잃은 친구에게도 다윈은 이 삶이 있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한때 다윈은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이끌어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876년 자서전에 의하면 그것은 "브라질 숲의 장관
가운에 서서 이 마음을 채우고 고양시키는 높은 경이, 경탄, 그리고 전념의
감정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며 "인간 가
운데는 단지 육체적 숨 이상이 있다고 확신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지
금 "가장 위대한 장관도 그러한 확신과 감정을 마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제 신과 영혼의 존재 문제가 감정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인간의 지적 능력 밖이라고 느낀 것이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다윈의 장례식 장면. 과학계뿐 아니라 정부와
교회의 지도자들도 참석하였다. 

다윈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이다. 1879년 편지에 "나의 판단은
가끔 변하지만 가장 극단적인 변화에서도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
서 나는 결코 무신론자인 적이 없으며 일반적으로(점차 나이가 들며) 그러
나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불가지론자라는 것이 나의 마음 상태의 좀 더 정
확한 기술일 것이다"라고 표현돼 있다. 창조론 반경에서는 다윈의 진화론
을 무신론주의라고 규정하지만 다윈 자신은 "모든 것의 시작의 미스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며 따라서 나는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는데 만족해야
한다"고 하였다.
 
1879년 독일 학생의 질문에 답하여 다윈을 대신하여 가족 중 하나가 보낸
편지에는 "다윈은 진화론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무엇을 신이라고 하는지 각자 정의가 다
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라고 나타나 있다. 다윈의 신은 계시, 벌과 보상
을 말하는 기독교의 인격신은 아니다. 그리고 이 학생의 재차 분명한 답신
요청에 응하여 다윈이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종교와 과학이 정
리돼 있다.

"나는 일이 많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에 충분히 답할 시간을 낼 수가 없을뿐더러 정말로 그들을 답
할 수도 없다. 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습관이 한 사람을 증거를 받아들이는
데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 나 자신
으로는 이제까지 어떤 계시가 있어 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미래의 생에
관해서 모든 사람은 상충되는 모호한 가능성 가운데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윈은 당시 믿었던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이 과학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
고 성경에 회의를 품게 됐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떠난 이유는 과학 외
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는 과학을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고 분명
히 했다. 다윈의 기독교 부정이 과학인 진화론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은 보편성을 가진 때문이다. 그가 종교와 과학
을 분명히 구분한 것은 진화론과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모순되지 않는
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진화론을 무신론주의로 연결시키는
기독교 주변의, 특히 창조론 주장의 본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생각에 젖어 여행에서 돌아와 책의 원고를 다시 읽어보니
이질감을 느꼈다. 이 책은 비판적 사고에 기초하여 의사(擬似)과학을 비판
하는 스켑틱 활동의 일환으로 진화론 창조론 논쟁을 다루기 위해 쓴 책이
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원고를 읽어보신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
원 안명준 교수님이 "과학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과학의 근거를 가지고
창조론을 비판한 점에서 저 자신만 아니라 창조론자들에게 자신들의 사역
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라는 부분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안 교수님의 "약한 진화론의 어떤 이론에 근거하여 창조론자의 이
론을 비판할 경우에 너무 단정적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논쟁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는 과학에 대한 확신을 경계하는 부분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창조론자의 문제점이 어떤 것이며 바로 이런 문제점을 창조
론자들이 해결해야 할 것임을 제시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지적하신
대로, 책의 집필 방향을 설정했다면 좀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고 늦게 알게
되었다. 이 방향으로 다시 원고를 정리해 보려고도 생각했으나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창조론이 되었
다.           
 
책의 표지 그림은 1300년대 오르카냐(Orcagna)가 그린 플로렌스 산타 크로
세 교회의 '사망의 신의 승리'라는 벽화의 일부에서 취한 것이다. 나병 환
자와 맹인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사망의 신에게 갈구하는 모습인데 그
림 전체로 보면 사망의 신은 이들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도덕적으로 타락
한 자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흑사병 유행 직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
질병을 하나님을 멀리한 부도덕한 죄에 대한 벌로 간주했던 기독교 사상이
묻어 있다. 그림속 인간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나 인간 종교성
의 근원인 고통과 공포를 상징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채택하였다. 원
숭이에서 인간의 진화를 묘사한 그림은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초정상주장
과학적조사위원회(CSICOP) 뉴스레터의 것이다. 기타 사진 부분은 특별하
지 않거나 이 책의 교육적 성격상 저작권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
여 확인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2003년 8월
峴 松 齊에서
저자 강 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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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 서문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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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9일 저자 강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