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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철학과 정치
 
  '스콥스 사건의 이해'
  글쓴이 : kopsa     날짜 : 99-11-10 21:56     조회 : 4711    
스콥스 사건의 이해

  미국에서 창조론자와 진화론자간의 제1 라운드 다툼이 1925년 테네시주에서
벌어진 '스콥스(John T. Scopes) 재판'이다. 이 재판을 이해하기 위해서 진화론
이 처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의 반응과 논쟁, 이 재판이 있기까지 사회적 문화
적 변화, 그리고 스콥스 사건의 직접적 배경을 살펴본다.

1. 진화론을 위한 순교 

  1859년 11월 11일  다윈(Charles Darwin, 1809-82)은 <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을  하버드의 식물학자 그레이(Asa Gray, 1810-88)와 같은 대학의
동물학자 애거시(Louis Agassiz, 1807-73)에게 보냈다.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학자로 통했으나  진화론에 대하여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졌다. 다윈과 개인적
친분을 가져 서신을 교환하기도 한 그레이는 이미 다윈의 이론을 수용하여 이를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퀴비에(Baron Cuvier, 1769-1832)의 후계자라고 알
려진 애거시는 1857년 < 분류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he Classification) >에
서 종은 하나님의 생각이며 불변이라고 선언한 인물이었다.
  1860년 1월 < 종의 기원 > 미국 판이 나온 직후 과학과 종교간의 논쟁에서 
애거시와 그레이는 서로 반대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애거시 외에 특히 언급할
진화론의 반대자에는 하버드의 보언(Francis Bowen)이 있었다. 그는 다윈은 인
간과 동물간의 엄청난 간격을 메꿀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
언의 주장은 무신론적 진화론에 반대하는 유신론(Theism) 옹호자의 지지를 받
았다.
  그 반대편에는 그레이 외에 지질학자 로저스(William B. Rogers)와 하버드 법
학과 파슨스(Theophilus Parsons)가 있었다. 이들은 공개토론과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상대방의 논점을 조목조목 공격하였다. 이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모든
양상을 충분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하나 진화가 사실이라고 그가 제시한 증거는
압도적으로 진화를 지지하는 것이며 진화의 원인으로 자연선택은 아직 충분치
못하지만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파슨스는 특히 진화의 무신론적 성격에 대한 공격을 물리치는데 그레이 다음
으로 공헌하였다. 그는 이성적 종교라면 과학의 계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은 인간 기원의 의문에 대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
에 이성과 종교는 과학이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유래했다고 해도 충격을 받을 필
요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이미 전부터 지질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성경을 말씀
그대로 믿을 것인지에 관한 의문과도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종교적 성향은 진화론에 유리할 리가 없었다. 이에 그레이도
다윈의 제안에 따라 자연선택이 자연신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글을 잡지에 실
리기도 했는데, 실제 다윈이 후에는 후회하였으나 < 종의 기원 >에 '창조자'라는
말을 쓴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우선 반대측을 완화시킨 다음 진화론의 지지
자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이와 같은 학자 반경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예제도 논쟁 그리고 후에
남북전쟁 때문에 언론은 진화론을 취급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종결되
고 특히 1868년부터 진화론은 언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찬반 양론의 기사를
전부 열거하지 않는다. 진화론의 갈등의 새로운 국면은 1871년 다윈의 < 인간의
조상(The Descent of Man) >이 출간되어서 나왔다. 이제 < 종의 기원 >에서
모호하게 기술했던 인간의 기원이 진화론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된 것이다.
  여러 논란 가운데 컬럼비아 대학 바나드 총장(President Barnard)은 1873년 만
일 자연발생, 유기적 진화 그리고 정신과 육체적 힘의 관련성이 사실이라면 신
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전망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진화론을 포기한 사람은 바나드 만이 아니었다.  예일, 프
린스턴, 윌리엄스, 암허스트, 브라운, 해밀턴, 라파예트, 로체스터 대학과 같은 유
명 대학 총장들도 인간이 비이성적인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그런 증명되지 않
은 가설'을 가르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경 비평과 비교종교학이 약해지던 분위기
에서 진화론은 자연신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반대자들을 감정의 격앙상태로
몰아갔다. 그래서 1870년대, 80년대 대학에 숙청 바람이 불었다.  진화론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는 남부 감리교 파에 의해 지배되던 밴더빌트 대학의 지질학 교수
윈첼(Alexander Winchell)이다. 1878년 그의 추방에 즈음하여 테네시 감리교회의
(Tennessee Methodist Conference)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불행히도 제대로 생각지 못하는 대중이 현혹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대학만이
억누를 수 없는 추정(speculation)의 말갈기에 대해 그의 아직 젊으나 강력한 다
스림을 댈 용기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짓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
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학을 원한다 그리나 조악하고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이론을 우리 후원자의 아들에게 원치 않는다. 우리는 과학을 가져야 한다. 그것
은 우리가 갖기를 원하는 과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히 증명된 것만을 원한
다....."

  그 뒤에 연이은 축출이 일어났다.  사유와 이름만 열거하면, 1879년 구약 성서
해석에 현대과학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권고 사직 당한 토이(C. H. Toy), 1884년
진화론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축출 당한 우드로(James Woodrow), 1891년 그리스
도의 신성에 의문을 표해 사직 당한 알렉산더 (Alexander), 그 2년 후에 이단 심
판을 받고 목사직을 박탈당한 빅스(Biggs)교수 등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합리적 자연주의(rational naturalism)' 방향을 거스릴 수 없었
는데 이에 기여한 최대의 학자가 미국 철학자 라이트(Chauncey Wright)이다. 그
는 1865년이래 10년간 특히 1870년과 1875년 사이에 진화자연주의 철학을 널리
알렸다.  영국의 미바트(George Mivart)에 의한 자연선택의 공격에 대단히 걱정
했던 다윈조차도 미바트의 1871년 < 종의 창조(The Genesis of Species) > 를 
논박한 라이트의 에세이를 읽고는 감명을 받고 자비로 인쇄하여 영국에 배포할
정도였다.
  라이트는 여러 저작물에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진화론과 자연주의에 반대
하는 주장의 근본에 있는 허위성을 벌거벗겼다. 그는 합리적인 종교라면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고, 자기-의식과 도덕성의 출현을 자연적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인간의 동물적 기원을 인정하면 인간성
과 영적 우위성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모든 근거 없는 두려움
을 논박하였다.
  그는 또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선호하는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종교에 대한 불
신으로, 또는 성스러움으로부터의 이탈로 간주한다는 것을 가장 불행스러운 일
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은 과학의 발전이나 진정한 종교적 정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보수주의와 비과학적 철학의 아이디어와 동기에 대한 비합
리적인 존경이라고  분명히 했다. 

2. 원리주의자와 진화론

  기독교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1934년 듀이(John Dewey)는 "종교에서의 원리주의자는 지적 내용에 대한 믿음
이 거의 과학적 발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아 온 자이다. 그의 천국, 지구, 인
간에 대한 개념이, 종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한, 코페르니쿠스, 뉴턴, 그리고 다
윈의 연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
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문화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현대 과학의 가르침에 더 잘 익숙해짐으
로써 원리주의가 곧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원리주의는 잘 살
아남았으며 20세기의 문화에 잘 적응하였다. 최근의 창조론자 중에 과학자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도 이를 나타낸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듀이와 같이 원리주의의 현대적 과학 문화에 대한 적합성을 과소 평가한 것은
이들의 현대과학과의 관련성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다윈의 진화론
에 반대하지만 또한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는 모르지만 과학적 견해의 점
에서 뉴턴만큼 현대적이다. 17세기, 18세기에 서양문화를 풍미하였던 베이컨주의
적 인식론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관찰 또는
실험, 일반화의 법칙을 준수한다. 이것은 현재 이들이 창조과학에서 사용하는 무
기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원리주의자는 19세기 미국의 비공식적 복음주의 개신교도의 후예이
다. 남북전쟁과 다윈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과학계는 성경을 믿는 복음주
의자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들은 다른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베이컨주의자였으며
과학과 전쟁을 벌이기는커녕 계몽의 귀납법을 철저히 융화시켜 자신의 믿음을
방어하는 도구로도 활용한 것이다.
  이들은 우주 디자인의 바탕에 신의 존재를 설정한 팔리(William Parley)의 <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을 대학 교재로 삼았으며 자신의 신학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게 되었다. 이들에게  변증자(apologist) 버틀러(Joseph Butler) 주교가 
<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유사성(The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1736) >에서 강조했던 대로 자연을 보는 과학적 관점에 의해 증명된
창조의 신은 성경의 신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나아가 19세기의 복음 변증자들은 기독교 진리를 위한 믿음, 즉 많은 역사적
증거가 성경의 사건을 지지해 준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
은 인간의 알려진 도덕과 필요성에 적합했다. 이러한  도덕적 이상을 표현한 저
자들이 역사 또는 과학의 사실적 문제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객관적인 과학적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상식에 대한 믿
음의 철학적 기초 하에 있다. 19세기 복음 지성인은 인류의 상식적 감각의 신뢰
성이 귀납적 주장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외적 세계, 다른 사람의
존재, 감각적 인식의 신뢰성, 기억 등등 그리고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 등은 상식이다.  이들은 시간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인간 지식의 동질성과 안
정성을 강조하며 그러한 확실성과 진리의 방법으로 알려진 과학적 지식은 성경
에 나타난 것과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질학의 출현과 함께 복음적 미국인은 성경의 사실들이 바로 그곳에 있다고
믿었다. 이때 문제로 된 것은, 지질학적 지구의 탄생은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하
나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단지 6일만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믿는 미국의 과학자는 '날들'이란 하루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오랜 시기(era)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창세기에는 빛이 첫째 날에 생겼으며 태양은 넷째 날 까지 나타나지 않
았다고 적혀 있다. 이런 문제는 당시 가장 최근의 과학적 발견으로 해석된다. 라
플라스(Pierre Simon Laplace)의 성운 가설에 의하면 행성은 태양을 둘러싼 성
운 기체가 냉각하여 생긴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라플라스의 이론을
채택하여, 빛은 첫째 날 생기지만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태양은 기체가 전부 제
거되는 넷째 날에나 나타날 것이라는 식이다. 이외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하튼,
신학자들은 과학과 성경이 상충되지 않는 점에 환호하였다.
  이들은 진화론이 나타났을 때에 처음에는 하버드의 애거시를 제외하고는 1870
년대까지 이를 받아들였다. 성경과 지질학적 이론과의 합의가 그러한 적응을 가
능토록 한 것이다. 이때 이들은 진화론적 발전은 의도적 디자인의 포기가 아니
라 모순이 없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때에도 몇몇 신학자 예를 들어 프린스턴의 호지(Charles Hodge)는 만
일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우연을 믿는 것이며 디자인을 부인하는 것임을 강력
하게 말하였다. 그는 디자인을 부인하는 것은 상식을 부인하는 것이며 신을 부
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남부에서 호지의 견해는 압도적으로 받아들여져
앞서 말한 대로 교수들의 축출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진화론과 관련된 토론은 지질학적 이론에 대한 복음주
의적 반응의 다양성과 유사한  정도에 그쳤다. 원리주의자도, 예를 들어 1910-15
년 사이의 원리주의 잡지< The Fundamentals > 내용을 분석하면 과학과 종교
에 관한 3가지 중요한 논의 가운데 2가지는 지구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보다는
훨씬 오래 전에 창조되었으며 비록 제한된 형태이나 진화는 디자인 및 유신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스콥스 사건의 배경

  그러나 다윈론에 대한 초기 복음반경의 이런 어정쩡한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
을 수 없으며, 1900년대로 접어들며 전개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은 진화론, 창조
론의 양극화를 초래하였다. 
  미국이 주요 유럽국가와 약간 뒤떨어져 재빨리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됨에 따라
과학계는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졌던 당혹감에서 해방되어 자연과학이 우주
의 신비를 파 헤쳤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사회과학, 심리과학이
합세하여 인간 진보에 대한 해석은 자연적 원인만으로 충분하다고 선언하게 되
었다. 그래서 1900년대 초까지 이제 존경받는 대학의 문은 교실에 자신의 믿음
을 주사하기를 원하는 과학자나 사회과학자에게 문을 닫았다.
  또한 이민자가 다수 유입됨에 따라 앵글로색슨 개신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환상을 추방하였고  다수민족 사회로 변질됨에 따라  평등의 원칙에 따라 공립
교육기관에서 교파적인 종교의 홍보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종교적 신조
와는 다른 과학의 중립성이 이런 다수 민족 사회에 좀 더 적합하였기 때문이기
도 하다. 
  이때 성경에 대한 부정적 비평도 이런 상황에 합세하였다. 이것은 다윈론과
거의 같은 때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성경의 생명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과 관련된 것으로, 성경의 영원한 진리의 문제로부터 기원, 과정, 발전의 질
문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런 새로운 견해에 접한  교육받은 사람가운데  성경
에 대한 확신성을 소홀히 하는 많은 사람이 나타났음은 물론이다. 
  이때 아직 존재하던 미국의 전통적 복음 기독교가 봉착한 어려운 상황은 상상
할 만 하다. 많은 대학계는 그들에게 현대 과학적 인물이 되려면, 생물학적 진화
를 수용하려면 성경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믿든, 박사학위 소지자를 믿든,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는 전통 신앙을 믿고 과학을 포기, 과학계의 이단자의 길을 택한 사람도  나타
났다.
  이런 상황은 제1차 대전이라는 전쟁이 가져온 다른 요인과 겹쳐졌다. 군 동원,
대규모 전쟁노력, 그리고 재즈 시대의 도래는 세속화의 진행속도와 정도가 어느
정도가 될지 염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1920년 금주법(prohibition
law)이 말해주듯 미국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 그 자체는 훈족에 의한 빅토리아 문화의 유린을 구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적인 성격으로 인식되었다.
  전쟁 중에 미국의 프로파간다는 야만인을 상대로 한 문명인의 싸움임을 가르
쳤다. 다시 말해서 독일의 도덕적 비합리성은 니체의 "힘은 정의다"에서 나왔다
는 것이다. 반진화론자는 이것을 적자생존이라는 진화 법칙과 연결시켰다. 그래
서 예를 들어 복음주의자 켈로그(Howard Kellogg)는 1918년 독일문화는 진화로
확인되었으며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들고 나왔다.  전쟁 후의 문화적 위기
는 이런 상황을 더욱 부추겨 독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를 믿는 복음적 믿음으로
부터 국민을 멀어지게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미국의 도덕적 붕괴를 진화론과 연관시키는데 큰 역
할을 한 원리주의자 반경의 인물이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다. 그
는 기독교는 과학적 진리에 대한 반대가 아니며,  진화란 진실이 아니며 단지
가설이라는 주장을 폈다. 또한 그는 1923년 도덕의 붕괴를 억제하기 위해 공립
학교 교육에서 진화론의 제거를 요구하며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억지로 인정을
강요하는 어떤 것도 진화론의 가르침으로 그들의 영혼을 망가뜨리게 하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앞서 말한 대로 원리주의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로부터 진화론, 창조론 간의 제1라운드 다툼
이 시작된다. 1923년 오클라호마에서는 교사나 교과서가 진화론을 언급하지 않
는다는 조건하에 공립학교에 무료 교과서를 공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플로
리다는 더 나아가 반진화론 법안을 통과시켰다. 1925년  "주의 모든 대학, 사범
대학, 그리고 기타 공립학교의 교사, 교원이 성경에서 가르친 인간의 신에 의한
창조 이야기를 거부하는 어떤 이론을 가르치는 것과 대신 인간이 하등동물로부
터 유래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위법으로 규정한다"는 버틀러 법안(Butler
Act)이  테네시주 의회를 통과하였다.
  테네시주의 이 법안은 분명히 시민 자유(civil liberty)의 침해에 해당되는 것이
며 이로부터  1925년 유명한 스콥스(John T. Scopes)의 '원숭이재판(Monkey
Trial)'이 일어났다.  진화론을 가르쳤다고 기소된 스콥스는 미국 시민자유연맹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이 테네시의 이 법안에 도전하기 위한
시범사례로서 내세운, 이에 자원한  대리교사였다.  이 연맹은 필요하면 대법원
까지 가져가 판결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스콥스의 변호인은 당대의 유명한 대로우(Clarence Darrow)였으며 3차례
대통령 후보였던 앞의 브라이언이 창조론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이 재판은   
매일 매일 재판진행 과정이 라디오로 방송된 '세기의 재판(trial of the century)'
이라고 불린다. 두 거물은 서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로울스톤
(Judge Raulston)판사에 의해 스콥스는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분명히 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이었다.
  테네시 법에 의하면 50달러 이상의 벌금형은 판사가 아니라 배심에 의해 결정
되도록 정해졌으므로 변호인은 항고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법원으로 가져갈 수
없었고 이 법안은 1967년까지 유효하였다.
  언론의 보도 등으로 보아,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스콥스, 대로우, 과학계의 압
도적 승리하고 평가하였으나 실제 진화론에 승리는 없었다. 재판에 의해 야기된
논쟁은 다른 사람들, 특히 교과서 출판업자와 주 교육위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론을 취급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재판 후에 오히려 고
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의 가르침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30여년이 지난 1957년 10월 4일 미교육계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
어났다. 소련에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것이다. 이것은 미
국 과학교육계에 충격을 주었으며 과학교육의 재편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진
화론이 다시 공립교육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1961년 미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은 생물과학교과연구(Biological Science Curriculum Study)
와 연계하여 진화론을 가르치는 기본 프로그램을 구성하였으며 진화론의 원리를
다룬 일련의 생물학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4. 참조

1) 아래 두 책에서 내용을 발췌, 번역 구성한 글입니다.
2) Ashley Montagu, ed., Science and Creationism,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84.
3) Michael Shermer, Why People Believe Weird things, W.H. Freeman and   
  Company, New York, 1997.